땀에 흠뻑 젖은 배낭, 그늘을 보고 들어온 와이너리 벤치에 앉아 쉬어가네. 이른 아침부터 삼부리 터미널에서 마슈로카를 타고 시그나기에 왔다. 돌아갈 시간이 정해져 있던 터라 빠르게 동네 한바퀴를 훑어 돌고 한적한 와이너리에 앉아 흘린 땀 만큼 와인을 마시고 있네. 조지아에서 여러 와인을 마시며 느낀 것이 (내 취향은 아니다만) 화이트 와인이 괜찮겠다 싶었지. 오크통을 쓰지 않아서인지 특유의 산미가 화이트 와인과 더 어울릴 법 했거든.
와이너리는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뜰에 야외 테이블을 가지고 있었는데 햇살은 아래로 직접 닿지 않고 선선한 산간마을의 바람이 건물사이를 통해 불어오는 것이 무척이나 쾌적하네. 고개를 들면 짙푸른 하늘이 지붕처럼 덮혀 있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의 대화와 웃음소리. 모든 것이 와인 맛을 더한다. 조금 발품을 팔고 세상에 대한 관용성을 넓히면 나의 하루는 좀 더 행복에 가까워 진다.
올리브유 가득한 닭고기 요리에 줄기까지 길게 살려 고수를 올리고 토마토와 렌틸콩이 나뉘어 올려 있다. 오일리한 것이 파키스탄 음식과 비슷한 면이 있는데, 와인의 산미가 전체적인 맛의 균형을 잘 잡아준다. 기름에 볶은 크게 썰린 고추 역시 품위를 더한다.
나는 와인을 좋아하지만 마셨던 와인의 이름도 품종도 별점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다들 사용하는 와인어플을 사용해 볼까 고민도 해봤지만 결국엔 눈에 보이는 와인을 마셔버리고 그냥 백지장처럼 아무것도 기억해 내지 못한다. 살인자의 기억법과 같이. 눈을 뜨면 와인병의 시체만 주변에 즐비하다.
갑자기 어떻게 생각 났을까. 김정은, 나에게 너에게 보내며. 이렇게 직선적으로 착하게 노래하는 소리를 오랜만에 듣네. 나의 기억속에 니 모습이 아직 남아있어. 기다려줘 니가 잠들어 있는 곳에서. 내게 다가온 어둠이 나를 너를 보낼꺼야. 좁은 로컬버스에 오르자 마자 그대로 잠에 빠져버렸다.
트빌리시로 돌아와 호텔에 가방을 던져 놓곤 거리로 나와 조지아산 맥주를 마시고 있다.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던 웨이터는 두번이나 '그릭'샐러드와 '그린'샐러드를 확인하고 갔으나, 결국에는 오더와는 다른 음식을 들고 나왔네. 문제없어. 새로운 도전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시작되는 법이니.
며칠이나 있었다고 이젠 그냥 오래전부터 살았던 곳 같네. 아는이 없이 홀로. 두번째 맥주는 스타우트 계열인데 제법 쓰다. 김정은도 혼자만의 다짐이라며 계속 노래하고 있다. 열시, 아직 술이 남아 있지만 곧 호텔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공항으로 떠나야 한다. 체크아웃은 미리 해두었고 새벽에 택시 잡기가 관건이네.
일정이 짧아서 인지 밀도가 높았던 조지아 여행. 머리속에 가득차 있던 숫자를 걷어내고 불편한 기억을 땀과 함께 몸 밖으로 뱉어 내며 거리를 걸었네. 러시아 국경 마을에서 아제르바이잔 국경까지.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와인을 마셨고,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어. 말년 휴가라는 거창한 타이틀에 맞는 그간의 모든 경험과 기억을 아우르는 대서사적인 생각의 정리는 당연히 해내지 못했지만, 많이 걸었고 옷이 축축해 질도록 건강한 땀을 흘렸네. 밤에는 손빨래를 해서 창가에 걸었다. 얼굴과 팔뚝은 눈에 다르게 검게 그을렸고 미소는 더욱 부드러워 졌다. 단단해지는 종아리를 치유의 과정으로 볼 수 있을까. 이땅의 신선한 야채가 나를 건강하게 만들고 있어.
얼굴이 굳지 않게 해야지. 부드럽게 미소짓고. 경험을 잊지 말아야지. 어느 상황에 놓여도 즐겁게 세상을 받아들이리라. 돌아갈 곳에서 조금 답답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세상을 둘러본 경험이 나를 올바르게 인도해 주겠지.
날씨가 참 좋은데. 오늘밤, 또 다른 곳으로 나.아.가.야 겠어. '22.4.26. 10.16pm 트빌리시 구시가 광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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